징후로서의 일상과 일상성
전민지(미술사, 미술비평)
당신은 일상적인 물체가 흩어져 있는 평범한 공간에 있다. 누군가의 삶이 스며든 이곳에서, 사물이 조용히 속삭인다. 시선이 그들에게 가닿는다. 정오의 빛 아래에서 그들은 낯선 얼굴을 비로소 드러낸다. 사물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탐구하고자 한 머피염 개인전 《정오의 낯선 물체》는 그렇게 시작된다. 돌잡이라는 전통적 의례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번 전시에서 사물들은 제각각의 시간을 품는다. 복수의 기성품이 한자리에 놓이는 순간, 의미의 이질성과 긴장은 불현듯 현현된다.
물질의 속살
모든 물질에는 생동성이 내재해 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일찍이 ‘생기적 유물론’을 논한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에 따르면, 비인간-물질의 행위성을 파악하는 과정은 고유한 능동성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1) 머피염이 구성한 공간은 이 점에 주목한다. 끝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다른 존재들과 얽히는 일상적 물체들은 단순한 배경이 되기를 거부한다. 도리어 관계망을 스스로 흔들어 재구성한 성좌를 펼쳐낸다. 옅은 갈색의 가발이 놓여 있는 <소파>(2024)는 커튼 너머 이따금 들어오는 햇빛을 조용히 맞이한다. 시선을 돌려 벽을 바라보면 천과 옷, 종이가 <멀티샵>(2024)이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걸려 있다. 한편 거꾸로 뒤집힌 목재 의자는 마른 호두와 코팅된 종이, 알루미늄 접시 등과 병치되며 <위시리스트>(2024)로 재탄생한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보장된 것은 없다. 이들을 이루는 각 부분의 경계는 명확해 보이나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점에서 흐릿하다. 식별 불가능한 갈망과 잔여물만이 무심한 틀 안에 잠시 머무른다. 이곳에 ‘소환’된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서로 마찰하고, 충돌하며, 어우러진다. 재배치된 존재들은 대담하게 그 이전의 의미를 거부하고 새로운 이야기의 틈새를 열어젖히려 한다. 이제 관객은 생동하는 물질을 갈라내어 가려져 있던 내부를 마주한다. 이 사물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나아가는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발현되고 무엇이 희미해지는가? 익숙함은 낯설게 변모하고, 물질의 속살은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 눈앞에 당도한다.
귀여움을 횡단하기
이번에는 연보라색 인형과 눈을 맞출 차례다. 플렉시글라스 박스 안에 담긴 마이리틀포니 인형은 <아리-아리 포니>(2024)의 일부로, 여느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귀여움’을 지니고 있다. 문화이론가 시앤 나이(Sianne Ngai)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귀여움이란 강력하고도 강렬한 미적 범주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물체들은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드는 일종의 도피처인 동시에, 유년 시절의 순수한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유토피아적 착각의 원인이다.2) 즉,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게 소비-소유 가능한 대상이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1981년에 여아 완구 브랜드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영화 등 미디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마이리틀포니는 컬러풀한 디자인과 캐릭터의 서사를 통해 감정적 연결과 노스탤지어의 상징으로 발전했다. ‘가짜 향수(fake nostalgia)’를 연구하는 머피염의 작업에서 이 인형은 그저 과거의 유물로 머무르지 않고, 일상과 기억, 그리고 감각의 꼭짓점을 생산한다.
한편 <갈색 별>(2024)에서 별 모양의 마른 잎, 캐나다 국기 속 별이 가득 새겨진 연필은 반복이라는 방법론으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익숙한 도상으로 자리 잡은 별들은 귀여움의 범주에서 소진되고 있는 듯 보이나, 작업 내 다른 오브제와의 결합을 통해 단순한 미적 특질을 비껴간다. 이로써 감춰져 있던 파동과 층위는 기존의 물질성을 횡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미셸 푸코의 접근처럼, (‘귀여운’ 두 작업에서) 가시성은 함정인가?3) 명료하게 드러난 표면은 사유를 제한하면서도 해석의 곁가지를 무수히 생성하는가? 낯익은 표상이 변주될 때, 별들은 고유한 이야기를 발화하는 존재로 나아간다. 다만 이들이 구축한 복합적 의미망 속에서 다층적인 관념과 질문을 발견하는 주체는 관객이어야 한다.
소리가 나(지 않)는 사운드스케이프
테니스공이 망사스타킹을 채우고 있는 <제스처>(2024)로부터 통통 바닥을 튀기는 소리가 (안) 들린다. 얇은 스타킹은 바스락거리고 있(지 않)다. 유리, 쇼핑백, 잡지 위에 몽키스패너가 끼워져 있는 <이갈이>(2024)에서도 덜그럭거리고 끼익대는 소리가 (전혀 안) 난다. 어쩌면 불쾌한 금속성 충돌음 역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위 작품들은 실제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음악이 흘렀던 DJ 양봉의 디제잉과 작가의 낭독 퍼포먼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관객의 내면에서 사운드스케이프가 형성된다. 소리의 질감마저 예상되는 감각의 차원이 전시장에 펼쳐지는 셈이다. 머피염이 작가 노트를 통해 명시하듯, 그의 설치물은 진동과 소리를 만들어내며 반리듬적 규칙과 흐름을 암시한다. 그 가운데 관객은 소리 없는 음향적 풍경 속에서, 사물이 지닌 내적 리듬과 반응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침묵과 소리의 차이는 청각 그 자체라기보다 ‘관심’의 문제이며, 마음의 변화나 감각적 수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4)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여백을 통해 물질적 존재의 실체를 새롭게 느끼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완성되는 음향적 서사를 구성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전시는 청각적 결핍을 역설적으로 활용해 내면화된 시간을 펼치고, 침묵 속에서 사물의 무게감을 증폭시킨다.
전체를 능가하는 개체
결국 머피염의 실험은 개별 물체의 총합을 초과한다. 돌잡이에서 직간접적으로 비롯된 일상 속 오브제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정화되어 징후적 사건이 된다. 사물의 의미에서 일련의 변화가 감지될 때, 일찍이 예측할 수 없었던 단서 역시 발견된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이는 물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던 속살이자 본질일 테다. 동시에, 이러한 조형 언어는 돌잔치 등 전통 의례가 지니는 주술적 특성과 맞닿아 있다. 즉, 여러 물건을 매개체로 삼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작가의 시도는 잠재적 우주의 단초가 된다. 이곳에서 태초의 것은 인간이 만들고 구성해낸 인식, 가치, 기능, 그리고 감각과 쉼 없이 공명하고 있다. 징후로서의 일상과 일상성은 이렇게나 기존의 세계를 붕괴하면서도 초월한다.
1) 제인 베넷, 문성재 역,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현실문화, 2020.
2) Sianne Ngai, Our Aesthetic Categories: Zany, Cute, Interesting,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3) Michel Foucault, Discipline and Punish: Birth of the Prison, Random House, 1975.
4) John Cage, “Experimental Music,” Silence, Wesleyan University Press,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