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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안 볼 때, 도메스틱 디아스포라 같은 사물들의 럭키호러쇼

김남수(안무비평)

사물들 내부에는 들끓어오르는 판타즈마[phatasma]가 있다(플라톤)고 믿었다. 지금의 사변적 물질론에서 그 판타즈마는 스스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즉 내러티브의 마이크를 움켜잡기 시작했다. 사물적 내러티브가 마치 가정학[家庭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준동한 것이다. 가정학이란 일본에서 태동한 말로서 밥하기, 자수하기, 청소하기, 설거지하기 등등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서(!) 꾸려내는 일에 관한 학문이다. 가정학에는 가사[家事]가 따라붙는데, 집 내부 공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노동들이다. 한국에서는 돌봄노동이란 이름으로 타자를 돌보는 노동으로 수렴되고 있지만, 이는 정확히 가정학 차원의 가사노동이다. 머피염 작가는 이 가정학 차원에서 판타즈마가 흘러내려 마치 사물 내부의 사건, 유령성, 자동기계 같은 감각적 작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한다. 할머니가 있는 개인 공간에서 자수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어딘가 유령성의 뉘앙스를 띤 채, 즉 애니미즘적인 느낌적 느낌 속에서 자수기계가 정감을 가진 존재처럼 자수를 놓는 것이다. 할머니라는 자애롭고 푸근한 어떤 선입견을 거슬러서 혹은 동행하면서. 그때 여성 내레이터가 문득 출현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과거에는 남성 내레이터가 영웅서사시 타입으로 쓴, 말하자면 <오딧세이> 같은 귀환극 속에 숨어있는 여성 내레이터를 복화술적으로 추출해내는 작업이 대세였다. 심지어 <오딧세이>만 놓고 보면, 오딧세우스가 마지막 환승역처럼 생각한 스케리아 섬, 그 섬에서 썸을 탔던 나우시카 공주가 다름아닌 이 서사시의 진정한 내레이터라는 설이 있었다. 이는 <에레혼> 즉 “어디에도 없는 땅”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유토피아를 썼던 사무엘 버틀러의 견해이다.

나우시카 공주가 판타즈마, 즉 사물 내부의 흘러넘치는 사건, 유령성, 자동기계의 감각을 부림한다는 것이 여성 내레이터의 육박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머피염 작가가 중고시장에서 사온 사물들, 기기들, 소품들은 대개 기존의 알 길 없는 내력이 이미 묻어있다. 그 알 길 없는 내력을 과거의 많은 매개자들, 영매들은 이계[異界]로부터 온 정령이나 악령일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채용하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머피염 작가는 나우시카 공주처럼 자신의 내레이션 하는 권능, 나아가 사물들 자율로 물적인 차원의 자기진술 내지는 사물들의 자동기계적인 연대를 시도하고자 한다. 사물 내부의 사건, 유령성, 자동기계를 디코딩하는 과정을 머피염 작가는 ‘인위적인 노스탤지어’라고 명명한다.

노스탤지어는 미디어아트에서 그 태동시의 사이버네틱스, 즉 동물과 기계와 사람 사이를 하나의 꼬치막대처럼 꿰는 인지과학적 피드백을 뜻한다. 사물들을 상대할 때에 그 사물 속에 스며있는 야생성, 다스림을 거역하는 야생성이 그 감각의 궤도대로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가정학적 공간 내부의 전체적인 카오스모스를 꾸려가려고 할 때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취하기 시작한다. 노스탤지어는 사물의 내력으로부터, 혹은 작가 스스로 실존적으로 투여한 어떤 권능으로부터, 혹은 그 양쪽에서 모두 작용하여 작동되는 것이다. 백남준 작가는 이 노스탤지어를 인공화하기 위해서 수학기호 루트 √를 사용했는데, 이는 두 번의 인위적인 반복을 통해 노스탤지어가 잠재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실화된다는 의미였다. 머피염 작가 역시 사물들 사이의 상호변조가 달콤하면서도 서블라임하게 일어나는 동시에 반복되기 시작한다. 유동적인 위상의 변화 속에서 사물들이 자리바꿈하고 기능나눔 하는 과정이라고 할까.

이처럼 사물들이 내레이터로서 마이크를 잡고 자기진술을 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그 가정학적 시공간이 뒤틀리고 곡률을 가질 수 있음을 허용해야 한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진다. 거기에는 사물의 야생성뿐만 아니라 사물만이 갖는 비인간적인 느낌, 이질감, 호러블한 이계[異界]가 묻어날 수 있다. 상호변조의 리듬이 보이지 않는 파동처럼 서로 스펙트럼 뮤직 한가지로 엮이게 될 때, 머피 염 작가가 원하는 것은 ‘도메스틱 디아스포라’의 위상에 있는 사물들의 질서가 아닐까. 문득 이 가정 내부에서 국내적인 맥락으로 떠도는 어떤 고혼[孤魂] 같은 존재! 모든 달콤하면서도 서블라임한 사물성, 그 내부의 판타즈마가 흘러넘치면 넘칠수록 그 반대급부로는 평행한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할까. 오래된 플라스틱 바가지가 나름 50년 세월을 견뎌내면, 나중에는 그 사물이 이무기처럼 혹은 요물처럼 자기 나름의 관록을 그 빛바랜 형체와 아우라에서 분비하게 된다. 그럴 때, 그 바가지는 가정학 내부에서 프리롤처럼 독자적이면서도 고립된 목소리, 소리없는 아우성을 발한다고 할까. 

<어느 드라마투르기의 고장나버린 시계>는 오작동하고 경련을 떨며 불능과 분해의 가능성 사이에서 사물들이 사건, 유령성, 자동기계의 뉘앙스를 띠고 럭키호러쇼를 하는 영상이다. 이 영상 속의 고장난 기계라든가 파이프 속의 관이라든가 하는 사물들이 움직이는 방식은 일종의 프릭쇼를 닮아 있다. 인간의 곁에 있는 신경다양성의 인간을 정령, 요정, 괴물, 환여신 등등으로 봤던 과거의 어두운 역사 속에는 사물들, 즉 비인간의 작동 속에서 인간적임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거꾸로 인간을 괴물화하는 기제를 재발견하기도 했다. 이 영상 속에서 머피염 작가는 인간이 없는 시대, 인간이 없는 풍경이 얼마나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인가를 그 순간적인 시간, 수직적 시간들의 지속에서 발견한다. 이 관람 방식은 사물 앞에서 관람자들이 도간[倒看, 엎어져서 보다] 해야 한다. 엎어져서 보다, 라는 것은 돌부리에 뜻하지 않게 채여서 넘어지는 사고의 짧은 찰나지간과 함께 그 널부러지는 신체의 상태로 진입하는 조건에서 보는 것이다. 이는 수간[竪看, 수직 방향으로 사물과 인간 사이의 분리/미분리를 보다]하는 것, 횡간[(橫看, 수평 방향에서 사물과 인간이 혼합/미혼합을 보다]하는 것 위에서 이루어지는 참여이다.

머피염 작가가 설치 형태로 그러한 참여형 퍼포먼스를 지향하는 것을 이러한 사물들의 프릭쇼 같은 성격에서 찾고자 한다. 작가는 ‘인위적인 노스탤지어’를 조장하고 연출하기 위해 스스로 자율적이며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스르르 돌아다니는 사물들의 으스스함과 살아있음을 병치와 브리꼴라주 형식으로 접근한다. 비록 작가의 손을 빌리는 것이지만, 그러한 대리는 곧 사물 자체의 본성적인 손이 나와서 마이크를 움켜잡고 내러티브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들끼리의 설치를 자기조직화의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루소라면, 자연이야말로 최대의 작용인이지만, 결국 자연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자연의 대리로서 인간의 손이 개입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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